[제243호 책지성: 에드거 앨런 포, 「적사병의 가면극」] 몸의 병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병에 대하여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장편 소설 『페스트』를 찾는 독자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급격히 늘고 있다. 1947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마치 2020년의 코로나19 사태를 예견이나 한 듯, 흑사병의 확산으로 인해 봉쇄된 도시 안에서 재앙에 대처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페스트』는 작중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따로 있다. 사실 카뮈보다 100년도 더 전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에드거 앨런포(Edgar Allan Poe)다. 포는 19세기 미국의 가장 독창적인 시인 · 소설가 · 비평가로 꼽힌다. 「적사병의 가면극」“( The Masque of the Red Death”)은 포가 1842년에 출판한 아주 짧은 단편 소설로서, 적사병 내지 붉은 죽음으로 불리는 전염병을 소재로 한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페스트』는 얼마 전 tvN 예능 프로그램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으니, 필자는 『페스트』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적사병의 가면극」을 코로나19 시대의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다시 읽고자 한다.

「적사병의 가면극」 읽기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적사병의 가면극」은 제목부터 필자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우선 적사병(The Red Death)이라는 단어를 읊조리자 흑사병(The Black Death)이라는 단어가 곧장 떠올랐다. 주지하다시피 『페스트』의 직접적인 소재가 되기도 한 흑사병은 14세기 중반에 창궐하여 유럽 인구 약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전염병이다. 적사병은 전염병일까? 흑사병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적사병은 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인 흑사병에서 창안한 허구적인 전염병인데, 흑사병보다 더 치명적이다. 그리고 제목에 사용된 또 다른 명사 ‘가면극(masque)’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용어로서 16-17세기 영국에서 왕후 귀족을 위하여 행해진 연극을 가리키고, 코로나19 탓에 사회적 의미가 굉장히 달라진 ‘마스크(mask)’와는 영어로 동음이의어다. 필자는 KF94 마스크를 쓴 의인화된 적사병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 「적사병의 가면 극」을 읽기 시작했다. 「적사병의 가면극」의 서술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적사병이 휩쓴 어느 왕국의 비극을 기록한다. 적사병은 그 어떤 전염병보다 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이 병에 감염되면 피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증상 발생 30분 이내에 사망에 이른다.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인구의 절반이 감염되어 사망했을 무렵, 프로스페로(Prospero) 왕자는 천 명이 넘는 건강하고 행복한 친구들을 뽑아서 그들과 함께 성으로 들어간 뒤 성문을 걸어잠근다. 더 이상 아무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올 수 없고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성은 그야말로 안전과 향락의 공간이다.
 격리생활이 다섯 번째 또는 여섯 번째 달을 맞이했을 때 프로스페로는 가면무도회 (masquerade)를 연다. 무도회장의 방은 모두 일곱 개이다. 그중에 일곱 번째 방의 창문은 핏 빛이고, 가면무도회의 참석자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자 가면을 쓴 사람 한 명이 너무나 흉측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를 인지하지 못한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마치 적사병 그 자체로 보인다. 프로스페로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일곱 번째 방에서 프로스페로와 침입자가 서로를 마주본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고, 1분 후에 프로스페로는 죽은 상태로 쓰러진다. 일부의 사람들이 침입자를 잡아 보지만 무덤 속 시체의 수의 같은 옷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가 적사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도미노 패가 연이어 넘어지듯이 사람들이 한 명씩 쓰러진다. 여기까지가 「적사병의 가면극」의 줄거리이다. 이 판타지적인 소설을 단숨에 다 읽은 필자는 한 가지 의문점과 마주치게 되었다. 적사병은 어떤 연유로 무도회장에 출현해서 프로스페로와 그의 친구들을 다 죽인 것일까?

적사병의 실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필자는 적사병이 육체적 질병의 차원을 넘어 정신적 질병의 차원에 진입하는 점에 주목했다. 프로스페로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문단에서 그를 수식하는 첫 번째 형용사가 다름 아닌 “행복한”(happy)이라는 사실은 다소 어색하다. 적사병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끔찍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스페로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서술은 그의 도덕적 결함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무책임한 통치자로서 프로스페로는 “건강하고 행복한 친구들을”(healthy, happy friends) 골라내어 그들과 함께 성 안으로 피신한다. 이에 대한 작가 포의 비판적 의식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프로스페로는 그들이 즐거움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했다. 음악이 있었다. 춤이 있었다. 아름다움이 있었다. 먹을 음식과 마실 와인이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벽 안에 있었고, 벽 안에서 그들은 안전할 것이었다. 벽 바깥에는 적사병이 배회하고 있었다.”

 아이러니가 서리어 있는 이 대목을 통해 프로스페로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중요한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벽 안은 안전하고 벽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진정으로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건강하고 행복한 ‘우리’와 아프고 불행한 타자를 구분하고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는 이 작품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프로스페로와 그의 친구들이 피를 흘리지도 않고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죽음에 이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이 병든 타자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안심하고 있는 바로 그 때, 적사병이 몸의 질병보다 더 치명적인 마음의 질병으로서 출현한다. 적사병의 가면극은 성공적이다. 적사병이 쓰고 있는 가면은 이 질병의 실체를 잘 숨겼고, 프로스페로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병에 서로 전염되었다. 이성복의 시 「그날」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1) 포는 이 무병(無病)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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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사병의 가면극」의 ‘지금 여기’

 최근에 필자는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시청하며 「적사병의 가면극」을 빈번하게 연상했다. 현재까지 자국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단 한명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북한에서 이미 많은 확진자들이 의료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에 관해서는 확인된 사실이 없으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북한의 지도자가 프로스페로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필자가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은, 일부 언론에서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확진 자와 관련해 성 소수자 혐오, 특히 동성애자 혐오를 조장하고 확산시키는 비윤리적인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난 7일 한 언론사 기사에서 이태원 클럽이 ‘게이 클럽’이라고 지칭되고 강조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혹자는 언론에서 이태원 클럽이 주로 게이들이 가는 클럽이라는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성 소수자 확진자의 성적 지향을 부각시키는 보도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타락한’ 동성애자들이 ‘무고한’ 이성애자들을 전염시키기 시작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이런 혐오의 흐름에 맞춰 지난 12일 또 다른 언론사는 이때다 싶어 “커튼만 쳐진 컴컴한방, 5년전 차마 못쓴 블랙수면방 취재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도대체 ‘수면방의 실체’ 따위가 방역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오히려 이런 기사는 이미 차별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성 소수자들이 아웃팅의 두려움을 크게 느끼도록 만들고 역학 조사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필자는 코로나19가 무섭다. 하지만 솔직히 혐오가 더 무섭다.
 아픈 세상으로 가서 함께 아프자. 그곳에서 ‘백신 이전의 약’을 찾자. 사회적 거리두기를 중단하자는 뜻이 아니다. 공감과 연대는 거리의 공동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적사병이 배회 하고 있다. 적사병의 마스크를 벗기고, 적사병의 가면극을 지금 당장 중단시켜야 한다.

각주
1) 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2008, p.63.

차 도 빈 /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