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호 문화비평: 팬데믹과 그 이후] 팬데믹과 그 이후를 생각한다

『Life As Surplus』(Cooper, Melinda 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5) 출처: amazon.com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여름 방학이 끝나고 신학기가 다시 찾아왔다. 간사한 마음은 벌써 이 조건에 적응해서 과거의 광경은 까마득히 잊은 것 같다. 가끔 소셜미디어가 띄워주는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보여주면, 다른 생애의 것인 양 느껴질 지경이다. 인류 역사상 숱한 팬데믹의 상황이 있었지만, 2020년에 닥쳐온 이 경우는 과거와 비교해서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금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한에서 최초 확인한 그 바이러스가 아니라, 전염을 통해 ‘자연 선택’을 받은 새로운 종류라고 한다. 숙주인 인간을 순식간에 죽게 만들면 증식에 불리하기 때문에 독성을 약화시키고 전염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이러스가 바뀌었다는 것인데, 바이러스 역시 인간이라는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고자 자기 변화를 꾀한 셈이다.
 그럼에도 치명적이지 않다고 해서 이 바이러스가 문제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염력을 강화한 바이러스는 개체의 치사율은 낮추어주겠지만, 전파의 속도가 빨라지고 범위가 넓어져서 환자수를 급증하게 만들 수 있다. 갑자기 늘어난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들 경우에 결과적으로 의료체계 마비를 초래해서 바이러스와 상관없는 다른 환자들의 생명까지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환자 개인의 문제라면 전염력이 강하게 바뀐 코로나 바이러스는 국가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겠다.
 결국 이 바이러스는, 슬라보예 지젝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바이러스 전염이라는 위험 앞에 놓인 개개인들이 공통적인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유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해당 집단의 운명이 판가름 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만을 챙기기에 급급하다면, 궁극적으로 공통의 기반을 파괴해서 공멸로 나아갈 것이라는 교훈을 이 신종 바이러스가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나 ‘공동체’로 재현하는 그 무엇은 공통적인 것을 의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자본주의는 이 공통적인 것을 이윤추구의 재료로 사용한다. 마르크스가 노동의 사회성을 언급했을 때, 이 사회성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팬데믹

물과 공기, 더 나아가서 온라인으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숱한 공감과 연대의 정념들 역시 이런 공통적인 것이다. 개인은 안전한 집에 앉아서 휴대폰 앱으로 배달 음식을 시키지만, 그 음식을 조리해서 배달하는 그 노동력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 숨겨진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한국은 강력한 격리조치 없이도 지금까지 급속한 국가 시스템의 붕괴를 저지할 수 있었다. 전례 없는 바이러스의 전파와 변이를 촉진한 것이 다름 아닌 전 지구적 단위로 촘촘하게 물류와 인적 이동 수단을 구축한 글로벌 자본주의 때문이었다면, 그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가능하게 만든 것 역시 발전한 통신기술에 기반을 둔 플랫폼 노동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이 바이러스가 글로벌 자본주의를 종식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너무 서구 중심주의적인 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너도 나도 자본주의의 종언을 운위했던 때가 2008년이었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전 지구적인 생존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글로벌 벨류체인(GVC)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던 아시아 벨류체인이 중국을 중심으로 건재했기 때문이다. 미중무역 분쟁으로 첨예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아시아 벨류체인의 성장은 미국 중심으로 구축했던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도를 조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이 몰락하고 중국이 부상해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패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예측 역시 크게 설득력을 갖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마치 과거 소비에트 블록의 붕괴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던 것처럼, 미국의 약화는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40년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현 체제의 붕괴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이런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전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은 대외적인 격동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기초한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백신의 개발로 이번 팬데믹의 상황을 해소하더라도, 이런 경향성은 더욱 강화되면 되었지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가 암시하듯이, 오히려 미국은 자신의 기반을 보전하기 위해서 신냉전의 구도를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어떤 국가의 정치인들도 팬데믹이 초래한 지금의 위기를 근본적인 혁신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펜데믹을 둘러싸고 넘쳐나는 숱한 수사들은 글로벌 자본주의를 재편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바이러스가 초래한 이 상황은 바이오산업의 규제를 느슨하게 만들어서 글로벌 자본주의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할 것이다. 멜린다 쿠퍼가 <잉여로서의 생명>에서 지적했듯이, 팬데믹과 같은 감염병의 전면화는 “자본주의적 섬망”(capitalist delirium)의 극대화를 유발해서, 지금까지 생명윤리적인 관점에서 금기시했던 지점들을 무화시킬 수 있다. 조르조 아감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일 것이다.

아감벤의 비판을 넘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은 갑자기 오염물로 취급 받고 어떤 ‘인간적인 절차’도 없이 매장되거나 화장되어버린다. 이 냉정한 위생학을 목도하면서 아감벤은 비인간적인 물질문명의 실체에 전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비정한 현실을 ‘인간성 상실’로 읽어내는 것은 또 다른 편향일 수밖에 없다. 아감벤의 개탄은 과거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에 우리가 누렸던 인류 문명은 인간적이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것은 상상에 존재했던 이상이었고 이 이상은 이미 글로벌 자본주의의 국면에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아감벤의 비판을 넘어서 그 비인간성의 근원을 탐구해야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더 가속화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쿠퍼의 지적처럼, 신자유주의적 생명관리정치의 핵심은 생명활동의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수치로 환원한다는 점에 있다. 국가의 생명관리정치와 달리 이 경우는 생명공학의 외피를 쓴 정치가 ‘객관적 지표’라는 만물의 척도로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무한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이 환원은 끊임없는 확장을 요구받는다. 말 그대로 이 생명의 잉여성을 자본의 운동과 결합시키는 것이 생명공학산업의 원리이지만 또한 그 과잉의 지점이 정치의 경로이기도 하다.
 인지자본주의와 결합한 신자유주의의 생명정치를 넘어설 수 있는 관점은 아감벤의 비판만으로 부족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던져진 난해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개인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다가 공멸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아남기 위한 공생을 길을 모색할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너무도 빤하지만, 현실은 다소 암울하다. 세계보건기구의 쇠퇴는 인류애의 시민윤리를 강조했던 전후 체제의 쇠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식적이나마 국제기구가 들어서서 담당했던 역할이 이제는 생명공학산업을 주도하는 민간기업과 재단으로 넘어가 있다. 백신을 개발하고, 전염병에 대처하는 국제적인 연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팬데믹으로 인해 그 이전부터 내재했던 전후 체제의 균열은 더욱 심화할 것이고, 글로벌 자본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고 본다. 이 국면에서 아시아 자본주의는 과거와 다른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여러 생산양식 중 하나로서 거론했던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사실상 글로벌 자본주의의 본질이 되었다. 이 새로운 위상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은 금물이다. 다만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의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역량이 곧 그 바뀐 위상에 대한 대응을 낳을 것임은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여기에서 취하는 우리의 상상과 행동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