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호 영화비평: <그린 북 Green Book>(2018)]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라는 복잡한 문제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라는 복잡한 문제

 ‘그린 북’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에서 흑인 여행자 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했던 소책자로 흑인 집배원이었던 빅터 휴고 그린이 만들었다고 한다. 흑인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호텔과 식당, 희롱이나 멸시, 폭력에 대 처하는 법 등이 자세히 나와있다고 하니 여행할 때조차 생존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알 수 있다. 영화 에는 흑인 피아니스트‘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운전사로 취직한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와 그의 부인 돌로레스(린 다 카델리니)가 이런 책이 다 있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장면이 있다. 그들 역시 이탈리아계로 미국 내에서 소수민족에 가깝지만, 인종적으로 백인인 탓에 흑인들이 ‘목숨을 걸고’겪 어야 할 일들이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린 북 Green Book>(2018)을 단지 피부의 문제, 즉 생물학적인 인 종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더해 계급, 섹슈얼리티, 지역 등의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인종과 계급, 뒤집힌 스테레오타입

 1962년 뉴욕 브롱크스. 입담이 좋고 허풍을 잘 떨며, 성질이 나면 주먹부터 나가는 다혈질 토니는 나이트클럽의‘기도(kido[木戶])’역할을 하다 가 클럽이 보수공사에 들어가자 일시적인 실직자가 된다. 그런 그에게 단기 ‘알바’제안이 오는데 그것은 흑인 피아니스트인 돈 셜리의 남동부 연주 투어를 책임질 운전사 겸 집사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집사 역할은 할 수 없다며 더 높은 급료를 부르지만 거절당한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토니가 원하는 급료를 주겠다며 그를 채용한다. 이는 인종차별로 유명한 미국 남부에서 토니가 일종의 보디가드 역할도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뉴욕 브롱크스에서 떠난 차가 펜실베이니아주, 오하이오주, 켄터키주 등 동부에서 남부로 향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의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흥미로운 것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백인인 토니가 비속어를 입에 달고 사는 하층민에 가깝다면, 흑인인 돈 셜리는 발음 하나, 억양 하나 또박또박 정확한 상류층에 가깝다. 토니는 햄버거, 치킨, 피자 등을 손으로 집어 입에 구겨 넣는 투박한 인간인 데 반해, 돈 셜리는 포크와 나이프가 없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교양인’이다. 토니는 돈 셜리가 리틀 리처드, 처비 체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등 ‘당신네 음악’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의아해한다. 그러면서 그는 쇼팽을 죠팽으로 발음한다. 흑인음악으로 상징되는 대중문화와 고전음악으로 상징되는 고급문화는 이렇게 인종을 가로질러 그들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해 주는 기호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같은 인종 속에 있는 서로 다른 계급을 끄집어낸다. “당신네 음악, 당신네 사람들”을 왜 모르냐는 질문에 돈 셜리는 흑인이라고 다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남부에서의 온갖 차별적인 규범을 만든 게 누구냐는 돈 셜리의 질문에, 토니는 자신이 만들지 않았으며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백인보다 자신의 생활이 더 흑인 같다고 항변한다. 이것은 인종과 계급 문제에서 두 가지 어려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 돈 셜리가 흑인이라고 다 같은 흑인은 아니라는 것은 정체성이 인종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체성이라는 심리적인 문제에 더해 물질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명성있는 피아니스트이며 심리학 박사이고(‘닥터 셜리’로 불림), 많은 돈을 버는 상류층이다. 그에 비해 토니는 백인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하층민이다. 그가 백인으로서 누리는 ‘특권’은남부에서 돈 셜리가 당하는 차별을 겪지 않는 것 정도이다. 그러나 뉴욕에서라면 그는 부유한 돈 셜리가 물질적으로 누리는 것의 10분의 1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계급으로만 환원될 수 있는 문제일까? 토니가 자신의 삶이 백인의 삶보다 흑인의 삶과 더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종이 하나의 계급처럼 작용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돈 셜리 같은 성공한 흑인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흑인은 빈곤과 차별 속에서 살아간다. 부와 명예가 있는 돈 셜리마저도 남부에서는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 흑인 전용 숙소, 흑인 전용 식당, 흑인 전용 화장실…. 마찬가지로 백인이 모두 부를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흑인이 겪는 온갖 인종적 멸시와 차별은 면할 수 있다. 특히나 남부에서 그가 돈 셜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백인이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 혹은 흑인 게이의 고독이라는 질문

 돈 셜리는 끝까지 품위(dignity)를 지키고자 한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품위는 단지 포크나 나이프가 없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가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남부로 연주 투어를 하는 것은 단지 천재 음악가로서의 음악 여정이 아니다.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다가가야만 하는 것이다. 걸핏하면 폭력을 쓰려는 토니에게 그는 폭력으로는 이길 수 없으며 품위가 언제나 승리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온건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품위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흑인 피아니스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다가도 화장실은 야외에 있는 더러운 ‘변소’를 쓰라는 백인들의 ‘품위’와 어떻게 다를까? 돈 셜리가 ‘자신의 사람들 (흑인)’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흑인 공동체에서 백인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엔진의 열을 식히기 위해 멈춰선 차에 기대 돈 셜 리는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들을 바라본다. 그 흑인들 역시 일손을 멈추고 돈 셜리를 바라보는 데 백인이 운전하는 차에 주인으로 있는 그의 존재가 그들에겐 기이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차에 탄 후 창밖의 흑인들을 계속 주시하는데 거기에는 당혹감, 두려움, 이질감 등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백인화’된 자신에게 비친 흑인으로서의 거울이 아니 었을까?
 <그린 북>이 인종과 계급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루는데 성공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것은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이다. 영화에서 이것은 잠시 스쳐 지나간다. 돈 셜리는 남부에서 백인 남자와 관계를 맺다가 경찰에게 붙잡힌 것을 토니가 돈으로 매수해 해결한다. 인종차별주의자에 가까웠던 토니(영화 초반부에서 그는 흑인노동자가 입에 댄 컵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가 이 부분은 쿨하게 넘어가는데, 그는 돈으로 해결한 자신을 질타하는 돈 셜리를 향해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의 명성에 금이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1962년에 흑인 피아니스트는 명성을 얻을 수 있어도 게이 피아니스트는 그럴 수 없었을 것 이기 때문이다. 돈 셜리의 섹슈얼리티 문제는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이 없지만 나는 이것이 그가 겪는 외로움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한다. 흑인 공동체에서 겪는 소외감, 부와 명성을 쌓았지만, 내면을 채우지 못하는 공허함에 더해 게이 남성으로서의 고독감 말이다(그래서 거의 연락을 끊고 산다는 형제가 혈연이 아닌 동성 연인이 아닐까 쓸데없는 추측도 해본다). 그가 “흑인 답지도 않고, 백인답지도 않고, 남자답지도 않다”라고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다고 말할 때, 남자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게이 정체성이다. 적어도 그 당시에 게이가 온전한 남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토니는 투박한 이미지와 달리 여행 중에 아내에게 매일 편지를 쓰는(비록 돈 셜 리의 문장 코치를 받지만) 애처가이자 부양가족을 책임질 줄 아는 ‘진짜 남자’이다. 영화의 마 지막 장면, 이탈리아계 공동체의 훈훈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된 돈 셜리가 느꼈을 가족의 온기는 추운 겨울의 심장을 녹여줄 만큼 훈훈하지만, 이성애적인 ‘정상 가족’을 자연화 하는 것 같아 좀 씁쓸한데가 있다.
 <그린 북>은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라는 복잡한 문제를 대중의 언어로 풀어갈 줄 아는 웰 메이드 영화다. 이 영화가 주는 보편적인 휴머니즘의 정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게이 남성의 섹슈얼리티 문제가 인종·계급의 문제를 잠식할 것이라 여긴 탓인지 눙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젠더 문제, 즉 어떤 여성 캐릭터도 비중 있게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정영권 /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