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호 테마비평: 판화로 보는 포스트 디지털 매체 시대] 포스트 디지털 매체 시대에 복제에서 공유로 전이되는 판화의 동시대성

2015년 4월 30일 부터 6월 31일까지 대안공간 정미소에서 《판화다, 그러나 새롭다》(필자기획) 전시가 개최되었는데 이 전시는 판화매체가 페인팅, 그래피티, 사진, 미디어, 설치까지 다양한 예술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는 상황을 조명했다.

 판화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시대, 고려시대의 직지,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를 비롯하여 유구한 인쇄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판화는 복제와 인쇄 메커니즘의 기술과 속도에 상응하여 발전되어 온 매체이다. 디지털 매체 시대에 컴퓨터 아트, 인터넷 아트, 웹 아트 등이 등장하면서 미디어아트가 미술계에 등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판화는 끊임없이 발전되는 기술과 예술의 동시성 논의에 있어 맨 처음 등장하는 미술 장르이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마다 판화는 항상 새로운 위기에 놓였고, 그 위기는 다양한 표현기법의 창출로 이어졌다. 목판화, 동판화, 석판화 등의 전통기법으로 제작된 판화는 평면성, 복제성, 보급성, 간접성을 매개로 그 미학적 가치가 서술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디지털 매체 시대를 넘어 포스트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는 비물질성을 강조한 디지털 이미지로 완결된 미디어아트뿐 아니라 설치미술, 장소 특정적 아트 등의 동시대 미술 사조와 조우하면서 발전해 가고 있다. 포스트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판화는 ‘판’이라는 매개 대신 물리적 전시공간에 설치 작업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판화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판화라고 정의 내렸던 규범들이 이젠 인터넷, 웹 아트, SNS 아트 담론들과 함께 기술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포스트 인터넷으로

 판화는 다른 장르와 다르게 ‘창작판화’라는 수식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술 매체가 발전할 때마다 판화는 기술 그 자체와는 다른 예술성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인쇄기술이 더욱 기계화되어 원본과 복제가 거의 유사해지자, 작가들과 미술계 관계자들은 복제물과 다른 순수예술품으로서의 판화를 규정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 1960년 9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되었던 제3회 국제조형예술회의에서 원작판화라고 분류할 수 있는 5개의 창작자를 위한 5개의 조항을 선별하기도 했다. 작가의 서명, 에디션 넘버(한정된 제작 장수), 원판 폐기 등 대량 인쇄물과 구분하기 위한 창작판화만을 위한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1959년 인쇄복제물이 예술작업과 극명하게 구별되는 전환점은 무엇보다 <EDITION M.A.T>의 활동이다. 다니엘 스포에리(Daniel Spoerri)가 결성한 이 그룹은 인쇄물처럼 동일하게 복제되는 에디션 개념에서 벗어나 똑같아 보이는 작업에 다양한 변수를 개입시켜 각각 다른 결과를 도출하게 했다. 캔버스 프레임 화면 속에서 오브제들이 관객에 의해 재배치되기도 하고, 오브제에 설치된 모터로 인해 관객에게 똑같은 조형이 펼쳐지지 않았다. 멀티플아트 개념은 산업사회에 대량생산되는 기계시스템에 저항했던 예술정신으로, 대량 생산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예술형식을 창출했다. 오브제에 동력 기계장치를 부착하거나 모터를 달아, 관객이 작업의 배치를 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멀티플아트가 대량생산 시스템에 대항한 예술운동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 컴퓨터 디지털 매체의 열풍은 판화 이미 지 존재와 수용에 급격한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뒤샹계열의 비물질적인 예술 개념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제작된 비인격인 미술 형식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때 손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회화에 대해 다시 조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초부터 작가의 수공예적 성격이 두드러졌던 드로잉에 대한 논의가 화두였으며, 같은 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판화·드로잉대전》이 개최되었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에서는 가상현실의 비물질 이미지 영역을 부유하는 것 이상의 체험이 요구된다. 그 결과 작가는 온라인과 동시에 오프라인(전시장)까지 장악해야 한다. 컴퓨터 네트워크 속에서만 체험했던 3D 오브제를 전시장에서 직접 접할 수 있는 일은 더이상 낯선 경험이 아니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에서는 관객이 실제공간에 있지만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판화 역시 3D 오브제를 전시공간에 끌어들이며, 공간의 특성에 맞게 설치미술로 확장되고 있다.

간접성에서 비물질 데이터로, 복제에서 공유로

 2000년대 이후 뉴미디어아트가 등장하면서 예술영역에서는 비물질성으로 존재하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숨 가쁘게 진행해 왔으며,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 변화로 인해 제작자뿐 아니라 작품을 전시하고, 홍보하고, 교육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완전히 변화했다. 커다란 변화 중 하나는 단연 유통의 문제이다. 디지털 예술작품은 몇 가지 기술장치만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예술작품의 복제문제보다 공유 문제에 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SNS 환경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무한 복제될 뿐만 아니라, 이 이미지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보급된다. SNS 플랫폼을 활용하여 전 세계로 특정 이미지(또는 영상)를 확산시키는 사람들은 플랫폼 참여자들이며, 이 참여자들의 활동에 의해 편집된 데이터들은 오늘날 새로운 형식의 예술작품으로 거론될 수 있다. SNS 플랫폼에 부유하는 모든 이미지들이 예술작품의 재료가 되며, 이제 그 부유하는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직되고 공유되는지가 중요한 쟁점이다.
 컴퓨터 기반으로 완성되는 디지털 예술 시대가 도래하면서 판화의 다양한 기법들은 곧 전통판화의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 정의되는 판화는 뉴테크놀로지, 뉴미디어아트 이론들과 만나며, 기존에 판화의 가치를 평가했던 기법과 에디션, 평면성의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오늘날의 판화는 미디어아트, 뉴미디어아트, 인터랙티브 아트, 설치예술 등과 긴밀한 조화를 이루며 생산되고 있다. ‘판’을 매개로 했던 판화는 이제 평면성을 넘어 평면과 오브제, 오브제 설치 개념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현재 판화가들은 전시공간의 전체 면적을 설치, 사운드, 영상으로 채우는 실험을 진척시키고 있다.
 1960-70년대는 현대판화가 활발히 번성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몇몇 작가와 그룹에 의해 아방가르드 예술 실천 슬로건이 세워졌고, 대다수의 현대미술작가들이 오브제, 설치미술을 파리 비엔날레와 상파울로 비엔날레를 통해 해외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강국진, 김구림, 이강소 등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 시기에 판화라는 장르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 및 설치작업을 완성시켰다. 1980년대는 판화의 평면성, 복제성, 보급성의 원론적인 판화개념에 천착했던 시기를 보냈고, 이 때문에 급변하는 기술시대에 상응하는 매체예술 분석에는 한계가 있었던 시기이다. 19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기술을 전격 활용하는 작가군이 등장했으며, 이들을 모태로 하여 그 경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전시장에서는 조각, 영상, 판화, 회화 등의 전공으로는 작가의 구분이 모호하며,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이른 판화는 동시대 미술 사조와 조우하며 담론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디지털 매체 시대의 비물질 데이터는 기존에 판화라고 규정했던 간접성, 복제성, 간접성 개념을 전혀 다른 차원의 형식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간접성은 비물질 데이터로 대치되는가 하면, 판화의 복제성은 무한복제가 가능해지면서 SNS 플랫폼의 공유 개념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은주 / 홍익대학교 판화과 외래교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