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호 책지성: 안희경, 제러미 리프킨,『오늘부터의 세계』(2020)] 코로나 덕분입니다

 책은 지성이다. 언어라는 상징계의 정연한 시각화가 가져다준 지적 전환은 역사적으로 문명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어 왔다. 또한 책의 형태는 각 시대의 경제와 문화적 관점을 반영한다. 오늘날 전자책과 온라인 구독 시장이 확대된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는, 현재 변화하고 있는 대부분의 분야에 각 주로 매달려 있는 이 경제체제의 전환은 특히, 데이터베이스의 효율적인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문학과 접맥해 있다. 따라서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전환은 결코 환경보호의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종이의 주재료가 되는 나무를 전자책을 만듦으로써 보호 한다는 것은 매체전환이 가져다주는 ‘결과’일 뿐이다. 만일 전자책 등장의 목적이 환경보호였다면, 여전히 출판시장 전체에서 종이책 출간율이 압도적인 상황이나, 심지어 고서적을 새로 복간하는 형태의 한정판까지 만드는 사례들을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전자책은 매체 접근의 효율성을 극대화 한 형태로, 종이책은 물성이 자극하는 감수성을 극대화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의 양상과 무관하게 요즘 전자책을 읽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서점에 갈 수 없어서’다. 현재 우리가 서점에 갈 수 없는 까닭은 딱 하나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서점은 공공장소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고, 노출되는 평균 시간도 꽤 긴 편이다. 또한 대형서점이 아니라면 밀폐되고 협소한 공간이기 때문에 고위험군 장소들과 다를 바 없다. 서점은 문화공간의 창출 등으로 자신의 존립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서점에 가고 싶다’, ‘안 가도 된다’, ‘가야지’와 같은 동사를 지워버렸다. 서점은 이제 단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자영업종의 한 형태로 포섭돼버렸다. 서점을 무척 좋아하는 필자도 한 달 전, 반강제로 전자책 무제한 이용권을 끊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코로나19는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그런데 무엇이 코로나 덕분일까?

축적된 사회문제의 돌출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팬데믹이 지속된 지 어느덧 한 해가 다 되어간다. 사태를 진정하기 위해 특별 방역체계를 구성한 정부는 건강권을 담보로 국민의 자율적 행동을 일부분 제한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권리가 서로 충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바이러스로부터의 안전을 염원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조금씩 내주었다. 건강한 공동체가 존재해야 그 안에서 개인도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는 국민적 합의는 코로나19 발생 초기의 마스크 대란도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줬다. 그렇게 K-방역은 성과를 내고 국제적으로도 여전히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대구에 이어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지역감염 형태로 확진자 수가 300명을 웃돌며 폭발했다. 이에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로 격상하는 한편, 추석 연휴 대이동을 자제시키고 집회를 제한시켰다. 권고사항이 전해지자, 과정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각종 매스컴 과 책임론을 두고 갈등하는 정치권의 다툼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대책이 아닌 코앞의 사태만 두고서 책임 공방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며 필자는 때로 무기력해진다. 두려움을 부추기거나 덮으려는 듯한 그 태도들에 말이다.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는 코로나19가 치사율 1% 정도밖에 안 되는 호흡기 질병이라고 말한다. 초기 언론에서도 그랬듯, 사스나 메르스에 비하면 위험한 바이러스라 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경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 처음으로 재감염 사례가 등장하는 등 면역이 잘 되지도 않고, 후유증 사례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불어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치명적인 질병이기도 하다. 초점은 코로나19가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사회 기반을 통째로 위협한다는 점에 있다. 오히려 수많은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과학자들은 코로나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보다는 그 이후의 세계에 더욱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코로나19가 발병하고 나서, 관련한 인문학 분야의 도서 표제를 살펴보면 ‘세계’라는 단어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다시 말해 코로나19는 대유행 질병 그 이상으로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강력한 동기부여 또는 일종의 종말론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보다는 전자를 더욱 믿는다. 다시 말해, 뉴노멀(New Nomal)을 만드는 것에 류로서 한 표를 던진다. 물론 누구든 디스토피아를 원하진 않는다. 하지만 행사하지 않으면 정말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촉발된 문제의 키워드만 열거해보자. 일자리, 인종차별, 혐오, 식량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2차 산업혁명 이후 자유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꾸준히 몸집을 불려오던 것들이다. 공장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숲은 사라져갔다. 값싼 노동력으로 고품질의 상품을 생산하는 이윤체계는 뼈저린 계급사회를 경험하게 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공장을 간다는 무식한 논리는 대학을 계급사회의 재생산 공간으로 만들었다. 기득권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럴수록 사각지대의 파이는 커져만 갔다.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 본다면? 확진되는 것보다 일자리를 잃는게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 마스크를 썼다고 두들겨 맞는 재외국민이 있다. 코로나19로 노년층 사망자가 속출하자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를 ‘부머 리무버(Boomer Remover)’라고 불렀다.(126쪽) 바이러스가 무섭지만 음식을 사기 위해 매일 줄을 서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장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송출된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확대경인 것이다. 자성의 목소리가 촉구됐다.

▲ 마사 누스바움 ⓒ 경향뉴스

뉴노멀? 그 전에 알아야 할 자유와 평등

 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이야기를 짧게 들어보자.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각 나라는 안전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지에 대해 논의해야만 합니다. (중략) 안전과 자유의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밟아나가야 할 과정이 많습니다.(133쪽)

 코로나19는 감염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이런 특징 때문에 확진자 동선 파악은 방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동선 전체를 공개하는 것이 개인의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제기했다. 한국은 처음에 확진자가 다녀간 음식점의 상호명까지 모두 공개했지만, 확진 판정을 받은 성소수자의 동선이 공개되면서, ‘강제 아웃팅’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한국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소수자 차별 및 혐오 문제를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확진자 동선은 필요한 상황에만 일부 공개가 되는 식으로 변경됐다. 필자는 이것이 정확하게 누스바움이 우려했던,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 본다. 그럴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진압이 가능할 거라 본 안일한 전망이 문제였을까?
 ‘자유’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다수의 합의를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평등은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한 일정의 희생을 지향한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반의어처럼 보이면서도 항상 서로를 연결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러나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단순한 절충론에 그치고 만다. 실제로는 자유가 평등을 무시하거나 평등이 자유를 묵살하는 형국이다. 코로나19는 이러한 이념과 가치에 대한 딜레마를 꼬집는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이 말은 잘못됐다. 개인의 자유, 안전을 위한 평등, 우열을 따질 수 없는 양 가치를 우리는 결국 봉합해야 한다. 『오늘부터의 세계』(2020)는 이 수술실에서 우리에게 신뢰라는 메스를 건넨다.

믿는 자에게‘극’복이 있나니

 필자는 무신론자다. 성당을 좋아하고 가끔 절밥도 얻어먹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어떤 믿음이 등장했을 때 그것이 어떤 간절함이 생겼다는 징조라는 점은 유신론자와 맥락이 같을 것이다. 『오늘부터의 세계』를 접한 이후 필자에게도 새로운 믿음이 생겼다.
 하루 종일 방에 있는 삶이 익숙해지고, 어쩌다 밖을 나서도 밖의 냄새가 무언지 모른다. 선선한 바람이 일어도 교정은 한산하다. 어쩌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걱정부터 앞선다. 이렇게 변했다. 이것이 포스트코로나의 뉴노멀이라면 믿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생존에 대한 믿음이고, 변화에 대한 믿음이다. 코로나19는 아주 가는 바늘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묵인했던 상처들을 찌르고 있다. 그 상처들이 덧나서 죽는 사람들도 있다. 이 고난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사실 마저도 누군가에겐 죽음보다 괴로운 일 일것이다. 결국 두렵다.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 떨어진 공간에 숨죽여 있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아닐까? ‘우린 살아 있어!’, ‘우린 바뀔 수 있어!’.

김 웅 기 /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