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호 문화비평: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보다

2019년 특강을 위해 초청받은 오사카 대학에 갔을 때 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나선 골목 어귀 파출소 게시판에 붙어있던 수배 전단지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훑어봤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문구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이름도 생소한 무장단체의 가담자 둘을 수배하는 내용이었다. 호기심에 정보를 검색해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74년 8월부터 시작해서 5월까지 도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를 비롯해서 주요 일본 기업과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 이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명의로 성명서가 나왔다. 단체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 수배전단은 그 사건 이후에 일제 검거를 피해 도피한 무장단체의 조직원에 대한 것이었다.
 이 단체에 대해 여러 경로로 알아보던 중에 나는 <외 박>과 <산다>를 만든 김미례 감독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팬데믹 때문에 개봉을 우려했지만 다행히 영화는 관객을 만날 수 있었고, 나도 극장에서 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당사자들을 영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이 단체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추정들을 명확하게 만들어줬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왜“동아시아”를 단체명으로 내걸고 다른 기업도 아닌 미쓰비시를 처음 목표로 삼아 타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이들이 왜“반일”을 기치로 내걸었는지 그 의문도 일정하게 풀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이 영화에 대한 여러 리뷰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지적하는“폭력투쟁”을 왜 이들이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단체의 명칭이 이미 이들의 지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GV에 나온 패널이나 이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를 쓴 기자들이 이 문제를 너무 쉽게 간과해버린 것 같아서 다소 아쉬웠다. 사실 이들이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 단체명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감상이나 소개가 대체로 폭탄테러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동아시아”와 “반일”, 그리고 “무장전선”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의 이름은 “무장전선”이라는 투쟁 방식 못지않게 “동아시아”와 “반일”이라는 지정학적인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왜 이들은 “국제”나 “글로벌”이 아닌 “동아시아”를, 그리고 왜 “항일”이 아닌“반일”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일까.

항일과 반일

<반일>(Anti-Japan)이라는 책을 쓴 미국 듀크대학 레오 칭 교수는 동아시아의 정서에서 “항일”과 “반일”을 구분해야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항일”은 주로 중국과 중화권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해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뉘앙스를 띠고 있는 반면, “반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이나 대만처럼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국가에서 채택하는 용어로 한국전쟁과 이어진 냉전체제에서 반공주의와 결합해서“민족”을 호명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왜 북한이 자신들의 건국신화를“항일무장투쟁”이라고 지칭하고, 왜 남한이 한일무역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벌이는 일본 제품 반대 캠페인을 “반일불매운동”이라고 지칭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반일”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들이 등장한 1970년대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다시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그에 따른 반일감정이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1972년 미국이 센카쿠 열도를 일본에게‘반환’하기로 결정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일본의 건재함을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1972년은 인도네시아에 있던 베네딕트 앤더슨이 수하르토에게 추방당해서 태국으로 갔던 해이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생생하게 밝히듯이, 앤더슨이야말로 당시 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시간으로 목격한 증언자였다. 앤더슨이 쫓겨나고 2년 후인 1974년 1월 15일에 일본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의 인도네시아 방문이 있었고 그 시기에 맞춰 자카르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같은 해 센카쿠 열도 반환에 항의하는 홍콩과 대만의 청년들이 미국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당시에 순전히‘소영웅심’에 젖어 섣부른 행동에 나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반제국주의의 코드 언어

 이 단체의 주동자인 다이도우지 마사시는 1970년 봄 호세이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연구하면서 고조되고 있던 반일운동을 무장투쟁으로 전개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생각을 같이한 이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당시에 쿠바를 비롯해서 제3세계 국가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던 도시 게릴라전이었다. 지금에 와서 이들의 투쟁방식이 과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소련과 미국 모두에 반대하는 비동맹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본 역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둥회의에 참석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시도할 때였다. 이들의 눈에 자신의 조국인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파렴치범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를 사과하지 않는 뻔뻔한 일본에 대해 도덕적 항의를 조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왜 시민들과 함께 하는 길을 찾지 못했는가 반문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전후에 다시 부활하고 있던 자본주의였지, 일본 사회의 변화가 아니었다. 이 자본주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글로벌한 규모로 재건되고 있었다. 이들이 관공서나 군부대를 타격한 것이 아니라,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자본주의의 골간을 파괴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최후 단계라는 레닌의 정의를 충실히 따랐던 것이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불장난이 아니었다. 당시에 세계는 소련의 한계를 넘어선 공산주의로 나아가고자 하는 혁명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핵심은 비동맹운동이 미국과 소련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마저도 이 공산주의 이념의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단순한 무장단체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다시 이들의 명칭을 살펴보아야한다. 이들은 “전선”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다. 이 말은 자신들을 영웅적인 전사로 본 것이 아니라, 전선에 가담하는 일원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이“전선”은 그 무엇도 아닌, 당시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던 제3세계 해방전선이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고립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후 부흥에 취해 있던 일본 사회에서 탈주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잔재와 부활에 맞서 싸우는 제3세계 해방전선에 뛰어드는 결단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어디도 아닌 동아시아였고, 아시아 반제국주의의 코드였던 반일이었고, 당이나 단체가 아닌 전선이었던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이들의 이름에서 “무장”만 도드라지게 부각해서 평가하는 태도들은 70년대 일본 청년들을 움직인 이념적 동기를 지워버리고, 그 행동의 과격성만을 문제 삼는 편향에 불과하다. 물론 그만큼 한국은 이른바‘시민의 상식’을 벗어난 모든 행동을 선제적으로 제거하고 차단하려는 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의 화염병을 잊어버린 지금 한국은 70년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출현하게 만든 그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을 가리켜 실패한 혁명가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 방법의 실패와 별도로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동아시아의 모든 문제가 제국주의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원에서 시작되었다는 진실 말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격파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착취구조였고, 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은 여전히 인류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택광 /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