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호 영화비평: <컨테이젼 Contagion>(2011)] 놀라운 예견, 현실화한 악몽

 때로 영화의 이미지는 현실세계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 반대로 현실세계의 이미지는 영화를 닮아간다. 영화처럼 영화적인 현실. 그것이 재난의 이미지일 경우 우리의 정서는 둘로 양분된다. 공포와 안심. 공포는 내가 본 이미지가 현실이 될 때 나타난다. 더이상 그 재난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반대로 안심은 그 재난이 나와 무관한 것이라는 정서적 상태다. 사람들은 왜 재난의 한복판에서 재난영화에 관심을 둘까? 현실을 잊기 위해 현실을 상기시키는 영화를 찾는 이유는 뭘까?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인 유행병(pandemic)이 됨에 따라 감염병을 다룬 이전 영화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웃브레이크 Outbreak>(1995), <컨테이젼 Contagion>(2011), <감기>(2013) 등의 영화가 새삼‘코로나 시대’의 필견 리스트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예견한 플래시포워드

 재난영화는 넓은 범주의 액션-어드벤처 영화의 하위장르지만 1970년대 이후로 하나의 독립적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할리우드에서 <에어포트 Airport>(1970), <포세이돈 어드벤처 The Poseidon Adventure>(1972),<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1974) 등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둔 후 재난영화는 자신만의 고유한 장르적공식과 관습을 갖게 되었다. 재난을 경고하는 과학자, 불안을 증폭시키지 말라며 은폐하는 관료, 재난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이기심과 탐욕의 민낯, 재난을 헤쳐 나가는 불굴의 투지와 숭고한 희생, 불화를 겪고 있던 가족의 화해. 할리우드와 한국의 대다수 재난영화가 이런 장르적 관습을 공유한다.
 <컨테이젼>은 결을 달리 한다. 재난영화가 많은 인간 군상들의 갖가지 모습과 행태를 제시한다 할지라도, 주인공은 정해져 있다. 그는 주로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에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며 어느덧 영웅적 변모를 보여준다. <컨테이젼>은 주인공 없이 멀티프로타고니스트 영화(multi-protagonist film)의 전략을 취한다. 홍콩 출장에서 돌아온 후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키고 사망하는 베스(기네스 팰트로)의 남편 토머스(맷 데이먼)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그는 어떤 영웅적 행위도, 그로 인한 위기 극복도 보여주지 못한다. 애초부터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재난 혹은‘사태’는 전 세계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MEV-1이라는 가상의 감염병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따라서 홍콩, 런던, 도쿄, 시카고 등 전 세계의 도시를 연결시킨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여느 재난영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장르로서의 재난영화처럼 어떤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아노미를 우려하는 관료들은 있다.
 예를 들자면 “애들은 누가 돌보고요?”같은 말들. 현 코로나 사태에서도 개학을 연기하는 몇차례 과정에서 가장 현실적인 걱정이 이것이었다. 자기의 친지를 오염지역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해 공표되지 않은 고급 정보를 알려주는 고위층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극악한 이기심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고민으로 이해 가능한 범위에서다. 공항 폐쇄 등 지역 봉쇄를 앞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컨테이젼>이 놀라운 것은 이렇게 장르적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태의 현실을 생생하게 미리 선취한 리얼리티에 있다. 정말로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2020년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플래시포워드(flashforward, 스토리 순서상 뒤에 나올 장면을 미리 제시하는 영화적 기법)다. 사재기, 폭동과 약탈의 치안 부재 상황, 거대한 체육관 안에 임시로 마련한 병실, 대량으로 매장되는 시신 처리장, 텅 비어 있는 마트와 공항, 음모론과 유언비어를 퍼 나르는 사이비 언론…….
 앞서 공포와 안심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공포를 느끼거나 반대로 안심하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공포를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감염병은 성별, 나이, 인종 등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전파되지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국가, 계급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란 예방 차원 뿐 아니라 완치율과 치사율 등 사후 처방의 능력도 가리킨다. 영국 총리 보리도 존슨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됐지만 인도의 가난한 빈민보다 완치될 확률은 몇 백 배 높을 것이다.

재앙의 근원으로서의 중국, 악몽의 귀결점으로서의 미국

 그런 점에서 <컨테이젼>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앨런(주드 로)의 존재는 문제적이다. 영화는 그를 호의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MEV-1에 개나리 액을 쓰면 완치될 수 있다는 루머를 퍼뜨리는데 일조한다. 조회수올리기에 급급한 옐로 저널리즘의 전형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약회사와 WHO가 결탁되어 있다. 미국과 프랑스가 이미 백신을 개발해 놓고도 풀지 않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그의 목적은 그런 음모론에 기생해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고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영웅이 없듯이 그도 악당이 아니다. 앨런의 주장은 허황돼 보여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오늘날의 거대 제약회사의 관심은 질병을 치료할 약 개발과 연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특허권 유지와 그것의 홍보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컨테이젼>이 바이러스의 최초 진원지로서 중국(홍콩)을 그렸다는 점에서 현 코로나 사태의 우한을 예견했다고 극찬한다. 사실, 이 우연한 일치는 이 영화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이다. <아웃브레이크>에서도 아프리카 발 바이러스 숙주 원숭이가 발견된 곳은 한국 선박 태극호였다. 한국 개봉 당시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20년도 안 돼 우리는 <감기>에서 바이러스의 전파자를 동남아 불법체류자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매우 손쉽게 타 인종·민족을 질병의 매개자이자 완벽한 타자로 재현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컨테이젼>이, WHO가 파견한 오란테스 박사(마리옹 꼬띠아르)를 납치하고 백신을 강탈하다시피 하는 감염된 중국인들을 설정한 것은 그‘정치적 올바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을 찌르는 데가 있다. 전 세계적 팬데믹이 창궐한 상황에서 이 가난한 중국인들에게까지 백신이 돌아갈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기 때문이다.
 <컨테이젼>은 마지막 장면에서 바이러스의 근원이 박쥐이고, 박쥐에서 돼지로 전염돼 홍콩 레스토랑의 주방장까지 이르렀고, 그와 사진을 찍은 베스를 통해 미국에 전파됐음을 밝힌다. 이것은 마치 사족이나 쿠키 영상처럼 제시되는데, 영화 속 캐릭터는 알지 못한 채 오직 관객에게만 알려주는 이‘은밀한 친절함’은 코로나19 초기에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공공연하게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른 혐오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알잖아. 중국이 문제라는 거. 이 재앙의 근원은 중국이야.’이는 거의 10년 앞을 내다 본 이 영화의 통찰력이 아니라 미국영화의 구태의연한 타자화에 불과하지만, 작금의 미국 현실은 영화보다 더 악몽 같은 ‘영화적 상황’을 연출해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최고의 의료체계와 최상의 제약산업을 보유하면서도, 최악의 의료복지 제도로 코로나19 사망자를 연고 없는 사망자가 묻히는 ‘묘지섬’에 집단으로 매장하는 미국의 살풍경이다. 그것도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가장 자본주의적인 도시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컨테이젼>은 10년 전에 작금의 코로나 사태를 놀랍도록 탁월하게 예견했지만 그 악몽이미국에서 현실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것이다. 현실은 점점 영화를 닮아간다.

정 영 권 /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영상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