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호 테마비평: 재난시대의 현대 여성] 진격하는 파워 페미니스트들

▲ <나는 살아있다> 공식 포스터 ⓒtvN

 우리는 지금 블록버스터 영화의 상상력이 단지 스크린 속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재난 이 스크린 속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전 세계를 강타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비상사태가 되었다. 지금 운 좋게 살아있다고 해도 과연 미래에 온전히 살아 있으리라고 자신하기는 과거보다 분명 어려워졌다. 이렇 듯 재난이‘현재 진행 중’인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특히 재난 앞에 남자들보다 한층 더 위태로운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재난 블록버스 터의 주인공처럼 우리의 취약하기만 한 몸을‘벌크업’해 어떤 충격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하드 바디’가 되어야 할까? 재난을 자신의 능력치를 증명할 기회로 여기는 액션 히어로를 흉내 낸다면 여성들은 침몰하지 않고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tvN 예능 <나는 살아있다>는 재난의 시대에서 여성의 생존 전략을 고민한 프로그램이었다. 제 작진은“대한민국 0.1% 특전사 중사 출신 박은하 교관과 6인의 전사들이 재난 상황에 맞서는, 본격 생존(生zone) 프로젝트”라는 설명과 함께 코로나19로 현실화된 재난 상태가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유라고 밝혔다.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은 20-50대 여성 연예인 6인이 교육생이 되어 여성 특전사 출신 교관에게 도시 생존, 자연 생존 훈련 등 을 주제로‘생존의 기술’을 배우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의 예능 <정글의 법칙>과 <진짜 사나이> 의 모방작 시비(是非)에 휘말리기도 했다. 거친 자연 속 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한 기술을 습득한다는 점에서 <정글의 법칙>과, 정신 무장과 의지력 배양을 강조한다는 점 에서 <진짜 사나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드 바디와 거리가 먼 여성들이 재난 대응 훈련을 통해 강인한 여전사로 변신하는 성장을 담고 있다는 점은 새로운 지점임이 분명하다.

재난과 여성의 자력갱생 프로젝트

 그간 대중 서사에서 재난은 ‘문명화’과정에서 유약해진 남자가 자신의 숨겨진 남성성을 되 찾거나 발견하는 남성성 획득과 성장의 드라마였다. 따라서 재난 서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성장 을 추동하는 무기력한 피해자의 역할을 강요당했다. 재난 서사는 가부장적 상상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남성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성장을 위해서 더 이상 애처로운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의 자력갱생 프로젝트를 담았다. 여섯 명의 여자들이 디스토피 아를 배경으로 “나는 살아있다”고 거듭해서 외치는 장면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자신의 생존은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당찬 각오를 담고 있다. 재난을 남성이 아니라 여성 주체 의 성장과 역량 표현의 계기로 재현하는 것은 가부장적 문화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낯설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제 발로 서기 위해 순응적 여성성을 거부하는 여자 들의 불온한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페미니즘 리부트’이후에 급증하고 있는 여성주의 예능의 일환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에 파워 페미니즘은 과연 여성을 위기로부터 구해 줄 급진적인 기획이 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약탈적인 글로벌 자본주의가 가져온 파 괴적 결과다. 코로나는 생태계의 지속적 파괴, 난개발, 다국적 기업의 자원 약탈, 대규모 공장 식 농업과 축산 산업으로 인한 환경 파괴가 불러일으킨 문명의 참사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 을 넘어선 세계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발생한 ‘인류세’(인간이 자연환경에 미친 영 향력과 자취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 지질시대)의 위기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살아있 다>에서 여성 교육생들이 불 피우기, 화재 시 완강기 사용법, 물에 빠진 자동차에서 탈출하기 등 비상사태에서 생존의 기술을 습득하는 장면은 다소 진부한 이벤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코 로나는 신종인수공통 감염병, 즉 동물이 자연 숙주인 감염병으로부터 인간에게 전파되어 감염 을 일으키는 질병으로서 재난의 새로운 측면을 읽는 날카로운 시선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이 유약한 여성성을 벗어나 강인한 여전사로 성장해 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은 재난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코로나19 이후의 또 다른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코로나 재난의 영향 력은 이미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젠더·인종적 위계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면서 증폭하고 있는 중이다. 각종 통계에 의하면 코로나로 경제적 성장이 멈추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사회적 약자 의 자리는 더 위협받고 있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노동 시 장에서 마치 키질(Winnowing)을 당하듯이 떨려 나갔다. 다른 한편으로 휴교와 자가 격리로 인한 재택 학습과 재 택 노동으로 인해 여성의 돌봄 노동이 증가함으로써 여성 문제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조차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까지 사회를 조직하는 성장, 발전, 효율, 경쟁, 생산 력 등의 원칙과는 다른 원칙, 즉 돌봄, 타자와의 공존 그 리고 자연과의 공생 등이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구상하는 기본적인 매트릭스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코로 나 이후를 준비하는 국가와 사회의 담론은 경제 회복이라 는 근대 문명의 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신자유주 의의 이데올로기로서 ‘기업가적 개인’,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다시 강화되고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긍정의 정신으로 불평등에 맞설 수 있을까?

 외환 위기 이후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비정상 혹은 파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성의 경험이나 시 선을 통해‘재난’이 상상되거나 사유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은 경제 위기의 사이렌이 울리자 일터에 서 가장 먼저 해고되고,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프롤 레타리아트)로 다시 노동 시장에 흡수되었다. 1990년대 들어 여성부가 등장하고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이루어지 는가 싶었지만 고학력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제동이 걸리 고 주변부 여성의 빈곤은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여성의 재난은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했다. 여성의 빈곤율은 남성보다 높고 상황도 더 나쁘지만 눈에 잘 띄 지 않는다. 남성 생계자 모델이 사회의 완강한 고정 관념 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파산’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난은 여성 혐오의 문화마저 불러 왔다. 경제 위기로 빈부 격차가 더욱 커지자 여성은 계급 갈 등을 조정하는 완충지대가 되기조차 했다. 따라서‘페미니즘 리부트’이후를 살고 있는 여성들 은 다시금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처롭기조차 한 자기 무장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살아있다>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재편 이후, 이삼십대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포스트 페미니즘, 즉 파워 페미니즘을 포스트 코로나의 대응 전략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높은 성과와 생산성, 지속적인 자기계발, 억지 쾌활함을 가치화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가부 장제의 성 역할이나 성 규범을 거부하는 페미니즘 상상력이 결합하면서 파워 페미니즘이 위기 에 맞서는 여성의 생존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 교육생들에게 교관이 서바이벌 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무한한 긍정의 정신이다. 이러저러한 생존의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은 사실상 주체를 유약하게 만드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심리적 드라마이기도 하다. 타고난 근수저(근육+금수저)이지만 고소 공 포증과 물 공포증이 있는 김민경이 여러 사람의 지지와 도움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화제성이 높은 대목이었다. 불안, 자신감 상실, 트라우마적 기억 같은 나쁜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생존의 필수적인 기술인 것이다. 이는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 은 결국 개인의 몫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구조적 차별을 은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발상 이다.
 이 프로그램은 은밀히 여성이 어엿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징징대거나 불평 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명령에 복종하기보다 회의하거나 불만을 제기하 는 것은 여성성의 나쁜 증거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무엇보다 건강하고 장애가 없고 우울증 같은 부정적 감정에도 시달리지 않는 남성을 인간의‘기본값’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점 은 더욱 문제적이다. 이 프로그램이 차용하는 군사주의적 훈련과 병사로서의 남성성은 우리가 지금 과거 독재 권력을 지지하는 애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만 은밀한 남성 모방 혹은 남근 선망 의 문화에 구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진짜 사나이>처럼 얼차려나 상명하복으로 대표되 는 군사주의 문화를 이상화하기보다 생존 기술의 습득이라는 차원에서 차용하는 듯하지만, 기 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남성이 인간의 모범적 모델로서 상정되고 있는 것이 다. 긍정의 정신이 예찬 될 때 서바이벌에서 탈락한 실격자들에 대한 혐오, 폭력, 증오가 향하 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파워 페미니즘이 과연 여성을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은하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