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호 인문학술: 동화의 재해석] 동화의 재해석

동화를 생각하면 어린시절 읽던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과연 동화란 무엇일까. 아이들을 위해 창작된 분홍빛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동화는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동화는 어른들의 창작물로 그들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다. 우리가 알던 동화를 다른 관점에서 마주보자.

▲ 안데르센,「인어공주」(1837)

‘동화’에 대한 두가지 관점

 ‘동화’를 창작하고 또는 향유하는데 있어서 크게 두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인생에 대한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 관계의 전복이다. 전자는 우리의 삶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일면 순응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인생에서 더욱 소중한 가치를 내면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후자는 이보다 강렬하고 진보적인 서사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두 관점이 서로 상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각각 사회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거나, 기존 사회질서에 반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동화는 ‘아이들만’ 보는 것, 교훈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화(장르)의 재해석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동화의 왕, 안데르센의 경우

 동화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은 안데르센이다. 방정환이 주도한 『어린이』 창간호(1923. 3.)에서 가장 처음에 실린 작품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였다. 그의 작품은 꾸준히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안데르센 사후 50주년 기념회’와 같은 행사가 열릴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동화작가였다는 점에서 안데르센은 말 그대로 ‘동화의 왕’이었다. 그의 작품은 「인어공주」 (1837), 「눈의 여왕」(1845), 「빨간 구두」(1849) 등 현대에서도 끊임없이 호명되고 변주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안데르센 작품의 강한 생명력은 그 안에 내재되어있 는모티프와 주제 등이 보편성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의 인생과 관련지어 분석되는 사례가 많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나무와 열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가의 삶을 넘어서는 작품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잭 자이프스는 『동화의 정체』(2008)에서 안데르센이 갖고 있는 모순적 계급의식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논의 역시 이를 바탕으로 전개하고 있다. 「인어공주」를 자기 부정과 그 합리화 과정으로 보고 있으며 금욕을 통한 자기실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이프스의 의견은 매우 흥미로우며 ‘계급’ 측면에서 해석했을 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인어공주’라는 주인공에 집중한다면 다른 논의가 가능하다.
 인어공주의 꿈은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인어공주는 왕자에 대한 사랑과 함께 ‘불멸의 영혼’을 원한다. 인어공주는 인어에게 주어진 300년의 삶보다 이보다 짧지만 불멸의 영혼을 갖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SF에서 로봇이 인간의 감정 등의 ‘불완전함’을 동경하며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과 유사하다. 왕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랑’을 중심에 둔다면 불멸의 영혼이 비중있게 언급될 이유가 미약해진다. 왕자와의 사랑이야기는 영혼에 대한 내용이 없어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만나기 이전부터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이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가시화된다. 인어공주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왕자와 인간의 영혼’ 때문이다. 이 둘은 결국 같은 것이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욕망을 이루는 방식이다. 인어공주는 왕자와 인간의 영혼을 갈구했지만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이지 않았고 물거품이 되는 운명을 택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 그 순간 인어공주는 욕망을 실현할 기회를 얻는다. 「인어공주」가 오랜 시간 다양한 연령을 아우르며 사랑 받아온데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심리와 욕망은 그것을 좇는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는 인생의 아이러니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안데르센에게 동화는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다 .「나이팅게일」(1843)에서도 이러한 인생의 아이러니가 나온다.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고 있는 황제는 자신의 정원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 나이팅게일이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사는 궁전에 관한 책을 읽다가 나이팅게일이 최고라는 구절을 읽고 당장 찾아오게 한다. 나이팅게일이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은 부엌에서 일하는 소녀였다. 화려한 물건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아름다움을 칭송받는 나이팅게일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황제와 신하들은 평소 삶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즐겁게 듣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은 대조된다. 여기에는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수반된다. 나이팅게일과 똑같은 모습을 한 인조새가 나오면서 이러한 의문은 심화된다. 몇 십번을 노래해도 지치지 않는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인조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나이팅게일은 이때를 틈타 숲속 으로 날아간다. 나이팅게일은 자유롭게 살던 새였다. 황제의 궁전에 살게 된 이유는 권력이나 무력, 보석과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진심으로 흘렸던 황제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항상 숲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날아간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의지로 떠났던 것처럼 다시 황제의 곁으로 돌아온다. 황제가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노래를 불러 죽음의 신을 떠나가게 한 후 나이팅게일은 황제에게 자신은 궁전에서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날아와 황제에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한다. 황제는 나이팅게일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아이러니는 안데르센 작품의 특징 중 하나 이며, 동화에서 인생을 어떤 방식으로 비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적확한 사례기도 하다. 그가 포착해낸 동화의 상이 유효했다는 사실은 동화의 왕, 동화의 아버지와 같은 수식어로 안데르센을 불렀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 안데르센,「나이팅게일」(1843)

아동의 세계, 그 자체로의 전복

 성인과 아동은 권력 관계에 놓여 있다. 성인이 중심이 된 사회이기 때문에 아동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나 아동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면 이 권력 구도에도 변동이 생긴다. 1926년 앨런 알렉산더 밀른이 쓴 『위니 더 푸우, Winnie-the-Pooh』에는 이 아동의 세계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이 아동의 세계는 아버지가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이 작품을 판타지 장르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현실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로빈이 밀른의 실제 아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화자인 아버지는 밀른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푸우와 다른 동물들이 사는 공간, Forest는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을 위해 만든 그들만의 세계이다.
 언어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마리아 니콜라 예바와 세스 레러가 각각 “상상계 언어와 상징계 언어의 극적 충돌이 일어나는 전형적 작품”, “언어의 숲을 통과하는 여행”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는데서도 잘 알 수있다. 특히 『위니더 푸우』는 ‘전복의 언어’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푸우는 풍선에 매달린 자신의 모습을 떠다니는 먹구름으로 표현한다. 이에 비해 크리스토퍼 로빈은 ‘풍선에 매달린 곰’ 이라는 제도권의 언어로 표현한다. 이처럼 이미지의 유사성에 근거해 푸우(곰)를 먹구름으로 바꾸는 것은 언어의 사회성에서 벗어난 자의적 표현이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언어는 푸우의 시인적 기질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시인은 익숙하게 보는 우리의 주변을 새로운 관점으로 또는 낯선 관점에서 표현하기 때문이다. 푸우가 자기의 생각과 상황을 일상의 언어로 설명 하지않고, 노랫말로 만들어 부르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 역시 푸우가 일상의 언어를 시인의 언어로 전복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다. ‘소리 나는 대로 쓰기’를 통해서도 언어 해체 양상을 볼 수 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쓴 “볼이리 잇스면 종얼 치새요”(PLES RING IF AN RNSER IS REQIRD)로, 올빼미는 쓴“새이리 추카해 새이르 추카해”(HIPY PAPY BTHUTHDTH THUTHDA BTHUTHDY)로 맞춤법에 맞지 않는 글을 쓴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Forest에서 가장 많은 문자를 알고 있는 인물이며, 올빼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문자 지식을 뽐내거나 다른 동물들을 무시한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서툴게 글씨를 쓴다는 것은 언어 규범에서 벗어난 이 문장들이 오히려 표준 언어임을 역설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 간의 불일치’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익숙한 기표에 기댄 새로운 해석으로 나타난다. ‘매복’은 아동에게 쉽지 않은 어휘다. 막대기나 몽둥이라는 의미의 ‘매’와 행운과 행복을 의미하는 ‘복’이라는 보다 친숙한 두 개의 기표로 분절하고 이를 결합시켜, “매 맞는 복”이라는 새로운 기의를 도출해 낸다.‘절차’라는 낱말 역시‘차’라는 익숙한 기표에 기대어, 자동차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익숙한 기표에 근거한 새로운 의미의 도출은 기존 언어 질서를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Forest라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기존의 기표 대신 새로운 기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코끼리는 ‘헤팔럼프’라는 새로운 기표를 지칭하고 있다. 헤팔럼프가 코끼리임을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없는 동물을 창조하여 새롭게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존재했던 동물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전복의 효과를 더욱 높인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낯설게 하기’의 거리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표’ 와 반대되는 양상으로 ‘새로운기의’가 있다. 기존 기표에 대응하는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푸우와 친구들은 새롭게 등장한 낯선 동물 캥거와 루를 내쫓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아하’라는 단어의 의미를 암호처럼 사용한다. ‘아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가볍게 내는 소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원문에 나오는‘aha’도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나 푸우와 친구들은 “네가 숲을 떠나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루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라는 새로운 의미로 바꾸어낸다. 이때 푸우와 그 친구들의 합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어의 사회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도권 언어의 규칙을 의도적으로 해체시키고 있 다는 점에서 언어의 전복을 보여준다.
 기존 언어 질서 관점에서 보았을 때 Forest의 언어들은 용납되기 어렵다. 오히려 이들은 교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러 한 ‘비규범적인’ 언어들이 ‘규범적인’ 언어로 인정되는 Forest라는 공간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성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그 공간은 온전한 아동의 세계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성인의 질서를 허물어버린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 킹』(1945)의 주인공 ‘삐삐’ 역시 거짓말이 특기이고 학교도 가기 싫어하며 어른들을 골탕 먹이며 즐거워한다. 어른이만 들어놓은 ‘바르고 착한 어린이’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함으로써 그들의 질서를 흐트러뜨린다. 특히 삐삐의 행동을 통해 성인의 위선이 드러난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동화에서 성인과 아동 사이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전복은 기존 사회의 위선과 과오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앨런 알렉산더 밀른『위니 더 푸우, Winnie-the-Pooh』(1962)

동화 속 동심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옛이야기부터 창작동화까지 모두 아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도 제시가 가능하다. 아동을 위한 이야기라는 것이다.‘아동을 위한’이라는 표현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독자로 설정하는 경우이다. 아동이 읽을 수 있는 동화라는 의미가 된다. 다음으로 아동이 등장하는, 아동이 주체가 되어 서사를 이끄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아동’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타지동화의 시작을 알렸던 작가 조지 맥도널드는“다섯 살이든 오십 살이든, 또 일흔 다섯 살이든 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동화를 쓴다.”고 했다. 일본 근대아동문학가 역시 아동이 아닌 ‘아동성’을 강조했다. 동화의 독자를 신체적 연령에만 국한시키지 않고있는것이다. 이 아이의 마음, 아동성은 우리가 동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심(童心)’에 대한 초기 논의는 이탁오의 「동심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탁오는 ‘동심’을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갖는 본성”으로 정의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 진실하지 않으면 최초의 본 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는 문장은 ‘동심을 곧 진심’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탁오가 동심을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갖는 본성, 즉 “마음의 첫 모습”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사람의 첫 모습”이라는 유비관계 때문이다. 이탁오의 ‘동심’은 동심의 시원을 추측할 단서를 준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동심을 진심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한데는 아동기가 삶에 있어 첫 시기며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 시기’라는 인식이 큰 이유가 된다. 특히 이탁오는 자라서 듣고 보는 것이 들어와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 동심을 사라지는 것으로 보았다. 도리와 견문은 동심을 위협하는 동시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탁오가 갖고 있는 동심관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탁오가 생각하는 동심은 본연적인 것이다. 이 동심은 문견이 발단이 되어 사라질 수 있지만 글을 읽은 성인들의 경우처럼 동심을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동심은 어린시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소유할 수 있는, 또 잃지 말아야 할 인간 본연의 마음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화에 대한 오해도 이 동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동심을 어리거나 유치한 말과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동심천사주의’와 같은 표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아동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이상화시키기도한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동심이라는 표현을 선뜻 사용하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화의 핵심은 바로 이 ‘동심’에 있다. 동화의 정체성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아직까지 가장 유의미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심’에는 보다 현실적인 역할도 숨겨져 있다. 가와하라 카즈에는 『어린이관의 근대』(2007)에서 그 시대의 우성 가치에 저항하는 부차 가치로서의 동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시대에서 인정받는 우성 가치는 곧 권력을 의미한다. 이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동심의 역할로 본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심은 인간 마음의 원형, 가장 선한 것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인생의 아이러니에 주목하며 우리가 잊고 살아 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에서 나오는 ‘진심이 담긴 황제의 눈물’은 어떤 보석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황제의 화려한 궁전과 진귀한 보석들이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 사회의 중심 가치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가치가 바로 ‘진심’인 것이다. 『위니 더 푸우』의 언어유희는 작품 전반을 이끌어가는 주요 테마이다. 이때 언 유희는 성인의 언어 질서체계를 벗어난 아동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일면 서툴게 보일 수 있는 이들의 언어유희가 이루어지는 공간 Forest는 성인의 언어 질서를 해체시킨 아동의 세계이며 이 역시 언어 규범이라는 중심가치에도 전하는 부차 가치 역할을 보여준다.
 동화는 아동이 등장하거나 또는 아동의 눈높이에서 삶에서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이는 현실에서는 대체로 배제되고 소외되는 가치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인과 질서에 대한 도전과 전복을 꾀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동이라는 ‘약자’의 위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동심’이 내재되어 있다. 동심은 그 시대마다, 또 필요에 따라 정의와 순수, 인정 등과 같이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동심을 보다 역동적인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동화를 재해석하는 첫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이 미 정 / 건국대학교 동화·한국어문화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