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호 영화비평: <애플>(2021)] 아름답고 기발한 세 가지 우화

 버스 창문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가 종착역에 도착해 깨어난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왜 버스 를 탔는지, 어디를 가려고 했는지는 물론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신원을 알려줄 만한 소지품 하나 갖고 있지 않았던 그는 결국 신원미상의 환자가 되어 병원에 수용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남자는 시간이 지나도 그를 찾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자 무연고 환자가 된다. 그리고 ‘신경 병원 장애 기억 부서’에서 진행하는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치료 방법은 물론 원인도 알 수도 없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속출한다는 영화 <애플>(2021)의 설정은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현실보다 낭만적이고 우리의 진짜 현실은 영화보다 더 아포칼립스에 가깝다. <애플>은 전염병이나 유행병이 창궐한 사회에 관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애플>은 경험과 추억, 상실의 고통, 그리고 사진 이미지(어쩌면 영화)에 관한 기발한 우화다.

규격화 된 경험과 텅 빈 추억

 기억상실 증상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신경 병원 장애 기억 부서’가 관리하는 병원에서는 기억을 찾을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기억과 경험을 하나씩 만들어감으로써 과거를 잃어버린 환자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인공과 같은 무연고자 인 경우가 많은데, 병원이 아닌 주거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프로그램이 짜 준 일들을 하고 그것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기록해야 한다. 그 일들이란 잊어버린 기억을 대신해 줄 새로운 경험 쌓기이고 추억 만들기라 할 수 있는데, 자전거 타기, 바에 가기, 파티 참석하기, 영화 보기와 같은 것에서부터 차고 나무 들이받기, 다이빙하기와 같은 보다 강렬한 경험까지 다양하다.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미션들을 착실하게 해나가던 남자는 극장에서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프로그램에서 요구하는 추억 만들기를 수행 하는데 동행하면서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했던 일들이 그에게도 해야 할 미션 으로 주어지면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이 프로그램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남자와 여자 모두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이 만들어 놓은 규격화 된 경험을 하나 하나 수행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남자가 그것을 알 길은 없다. 규격화되고 프로그램화된 경험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까지가 그들 내면으로부터 시작된 진정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은 참여한 사람들에게 같은 경험을 수행하도록 한다. 그 결과 프로그램의 참여자들은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포스터 앞에서 비슷한 포즈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데, 그 장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식당에서 찍은 수만 장의 비슷한 사진이 게시되어 있는 SNS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애플>의 세상에는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다. 매번 해야 할 미션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되어 우편으로 전달되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아날로그 사진첩에 붙여서 보관한다. 철저하게 아날로그적이어서 오히려 판타지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이 영화 <애플>의 세계다. 그러나 그 아날로그 세상의 이야기는 디지털 네트워크 속에서 규격화되고 프로그램화된 경험을 반복하는 현재 우리에 대한 반영이자 풍자가 된다.
 규격화된 경험으로 만들어진 추억을 기반으로 고유한 개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남자의 경험과 추억의 보증물은 폴라로이드 사진이다. 영화가 잠깐씩 비추는 폴라로이드 사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프로그램이 지시한 일을 수행했다는 사실 뿐, 그 남자의 내적 경험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행위는 기록되어 있지만 감정은 기록되지 않는 폴라로이드 사진은 규격화된 경험이 텅 빈 껍질, 텅 빈 추억일 뿐이라고 말한다.

무표정한 얼굴의 카타르시스

 사실 <애플>의 주인공 남자는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곁에 있던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고통으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했다. 새로운 자아를 만들려는 남자의 시도는 실패했고, 그것이 고통을 주는 기억이더라도 그는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기로 한다. 남자가 거짓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하는 단서들은 영화의 중간부터 간간이 제시된다. 기억상실증 환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면 거짓 환자였다는 설정이 이야기의 독창성과 재미를 더하는 반전의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설정은 재미 =를 위한 반전을 뛰어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플>은 상황의 묘사가 섬세한 것에 비해 설명과 표현적인 측면이 절제된 영화다. 표현의 절제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인물의 얼굴로 대표된다. 회화 속 얼굴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자끄 오몽(Jacgues Aumont)은 상징적인 유형화를 목표로 한 얼굴과 표현적이고 감정이입적인 얼굴이 있다고 한 바 있다. <애플>의 주인공 남자의 얼굴은 이 둘 모두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특정한 계급을 대표하지도 않고 권위와 같은 관념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내적 상태를 포착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의 무표정은 기억상실로 인해 모든 것이 초기화된 사람, 자아가 텅 빈 인물로 그를 보이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가 기억상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순간 그 무표정한 얼굴은 회고적으로 더 없이 깊은 표정을 갖게 된다.
 남자가 거짓 기억상실증 환자를 연기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안고 있는 고통의 크기다. 남자에게 기억상실증 환자 행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감과 삶을 이어 나갈 수 없을 만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를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기억을 지움으로써 존재를 지우려는 상징적 자살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 것이 무엇이든 그는 그만큼 힘든 순간을 통과하고 있었고, 거짓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은 그 모든 내면의 표정들이 일시에 무표정한 얼굴에 투사되게 만든다. 그 순간 꽁꽁 차단되었던 관객의 감정이입 또한 터진 둑을 넘치는 물줄기처럼 집중된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떤 풍부한 표정의 얼굴보다도 큰 카타르시스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사진적 이미지에 대하여

 <애플>은 그리스 감독인 크리스토스 니코우(Christos Nikou) 감독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 작이며,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미장센과 주제를 풀어내는 독특한 이야기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다분히 사진 이미지(그리고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 이미지는 그 대상이 거기 있었음을 증명하는 지표성의 특징을 통해 강력한 객관성과 신뢰성을 갖게 된다.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의 관리자들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남기도록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을 통해 참가자들이 충실하게 프로그램을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통해 자신의 성실함을 관리자들 에게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진들로 기억과 추억을 쌓아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것에는 실패한다. 그 이유는 그가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능력에 더해져야 할 사진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 사진들이 개인적인 것이 배제된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행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진의 가치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는데, 주인공 남자에게 그런 가치를 불러일으킨 것은 길가의 쇼윈도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연인의 흑백 영상이다. 길을 지나던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찍은 영상을 긴 시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자는 처음 본 영상 속 대상에게 사로잡히고만 것이다. 그가 영상 속 연인들에게서 개인적인 어떤것을 발견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아무 설명 없이 삽입된 그 한 장면만으로도 남자에 대한 유효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사진 이미지와 기억의 촉매라는 사진 이미지라는 두 가지 가능한 본질을 마주한다.

성 진 수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