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호 영화비평: <싱크홀>(2021)] <싱크홀>로 되돌아보는 2009년 이후 한국 재난영화

 재난영화(Disaster Film)가 하나의 장르로 인식된 것은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 재난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1953), <뎀, Them!>(1954), <신체 강탈 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56) 등의 영화도 외계인이나 괴생명체의 지구 침공을 다루고 있는 재난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은 유사한 소재 · 이미지가 일련의 흐름, 즉 사이클을 형성함으로써 하나의 장르로 화했는데, 여기서 유사한 소재 · 이미지란 괴수(Creature)를 가리키며 그래서 이러한 영화들은 주로 괴수영화라 불린다. 즉 재난의 상황이 서사의 주된 요소라 할지라도 보다 특정한 괴수의 이미지가 전체 장르 명칭을 좌우한 것이다. 물론 재난영화는 괴수영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통상적 의미에서 재난영화라 부르는 것은 1970년대 <에어포트, Airport> 시리즈, <포세이돈 어드벤쳐, The Poseidon Adventure>(1972), <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1974), <대지진, Earthquake>(1974)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이다. 괴수의 공격이라는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이 아니라 해일, 지진, 화재 등과 같은 자연재해나 인재를 다루는 재난영화는 위협받는 대상이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 각계각층의 인물이 피해자로 등장하면서 한 사회의 축소판이 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한국 재난영화를 <해운대>(2009)로 보는 것은 합당해 보인다. 그 이전에도 대화재를 다룬 <싸이렌>(2000), <리베라 메>(2000), 괴수가 등장하 는 <용가리>(1999), <괴물>(2006) 등이 있었지만 위의 특징을 공유한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장르영화가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재난영화만큼 그것을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장르는 드물다. 자연재해든, 인재든 재난영화는 단지 눈에 보이는 재난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회가 무엇을 위기로 인식하는지, 무엇을 재난으로 여기는지가 재난영화를 통해 드러난다. 또한 그러한 영화에 많은 관객이 몰렸다는 것은 사회가 위기와 재난으로 여기는 것에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개봉 1주일 만에 120만 관객을 돌파한(2021년 8월 18일 기준) <싱크홀>의 흥행은 흥미롭다. 영화의 완성 도라는 미학적 잣대로만 생각해 볼 때, 이 영화는 ‘재난’이다. 캐릭터의 성격이나 미묘한 심리 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에서 초기 상황 설정과 캐릭터 구축에 너무 많은 시간을 안배한다. 간간이 재난을 암시하는 상황(수평이 안 맞아 구슬이 굴러가는 것, 유리가 깨지거나 땅에 금이 가는 것 등)이 제시되지만, 그보다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과장된 코믹 설정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영화 시작 40분이 지나서야 땅이 꺼지는데, 너무 늦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재난 상황이 늦게 일어나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차곡차곡 서사의 벽돌이 쌓인다면 말이다. <싱크홀>은 그 과정을 소홀히 하고 차승원의 ‘원맨쇼(?)’에 너무 기댄다.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영화의 장르 미학이 아니라 장르 사회학이다. 즉, <해운대> 이후 한국 재난영화가 한국사회를 어떻게 드러내 왔는가가 이 글의 관심사다. 사회학자 주은우는 <해운대>를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강요당한 고통과 좌절을 치유적으로 의미화하고 불안과 소망을 투사하는 사회적 판타지로 해석했다(「한국 재난영화의 탄생과 국가적 트라우마의 반복: 위기영화로서의 <해운대>의 판타지 분석」, 『사회와 이론』33집, 2018, 66쪽). 위에서 언급 한 197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나 1990년대 <볼케이노, Volcano>(1997), <단테스 피크, Dante’ s Peak>(1997), <딥 임팩트, Deep Impact>(1998) 등의 재난영화가 위기에 대처하는 전문가 집단과 기술관료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데 반해, <해운대>에 지도적 인물은 부재하고,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오직 쓰나미를 피해 울부짖고 도망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IMF 이후 각자도생의 생존주의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의 수용 여부는 독자의 자유지만 2010년대 재난영화의 흐름을 돌아본다면 그럴듯한 해석이다. <연가시>(2012), <타워>(2012), <더 테러 라이브>(2013), <감기>(2013), <부산행>(2016)과 그 연작 <서 울역>(2016), <터널>(2016), <판도라>(2016)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이클은 자신(과 가족) 외에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각자도생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위기의 상황을 타개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전문적 지도자(결정적 시기에 이타심을 발휘하는 희생적 인간)와 자기만 살겠다고 버티면서 인명구조에 불공정한 태도를 보이는 이기적 인간으로 나뉜다면, 한국 재난영화에서 전자는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타인을 돌보지 마라’는 이 시대의 정언명령인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떠한가?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국가는 국민의 보호자다. 일부 대자본의 ‘일탈’이나 일부 관료주의의 병폐가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지언정 그것은 말 그대로 일부이며 일탈일 뿐이다. 결국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국가다. 반면, 2009년 이후 한국 재난영화에서 국가는 무능과 무책임의 결정체다. 물론 위기는 국가에서 비롯하기보다 민간 기업에서 발생한 다. <연가시>는 자본 논리에 잠식된 제약 회사로 인해, <감기>는 이주 노동자의 불법체류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챙긴 중간 브로커로 인해, <터널>은 건설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부실공사로 인해, <판도라>는 원전 폐쇄로 인해 이윤 하락을 우려한 핵 마피아로 인해 위기가 악화한다. 여기에서 국가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는데, <터널>에서 ‘보여주기’식 위기대처에 급급한 국민안전처 장관(김해숙)은 당시의 대통령을 연상시킬 정도다. <감기>와 <판도라>에서 책임 있는 대통령이 등장하지만 이는 할리우드의 관습을 그대로 차용했거나 당시 한 국의 현실을 정반대로 전도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이쯤에서 2014년 세월호 이후의 재난영화가 보여주는 ‘파국의 서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이전의 영화 <해운대>와 <타워>가 재난 속에서 가족이 형성되고 위기를 극복하면서 공동체가 재건되는 이야기라면, 세월호 이후의 <부산행>, <서울역>, <판도라>는 가족 중 누구 하나가 희생되지 않는다면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는 잔인한 함수관계를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터널>의 해피 엔딩, 즉 홀로 고립된 가장(하정우)이 극적으로 구출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저 ‘재현 불가능한’ 현실의 비극과 슬픔을 허구적으로 위무하는 일종의 제의에 가깝다. 물론, 역사의 특정 시기에는 그러한 기만적인 위로가 위기의 순간에 또 다른 투쟁의 동력이 되지만 말이다(최은, 「동시대 한국영화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 <터널>(2016)을 중심으로」, 『영화연구』72호, 2017, 319쪽). 소위 ‘촛불혁명’의 과정에서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의 발원 지점은 무엇보다도 세월호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촛불혁명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문제는 촛불혁명 이후이다. 촛불혁명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유시민 이 명명한 ‘후불제 민주주의’의 대가를 돌려받고 난 후, 불현듯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내 삶의 현실적 문제들이다. 그렇게 형식적 민주주의는 되찾아 왔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확실히 <엑시트>(2019)의 저 유쾌한 웃음과 건강한 삶의 활력은 재난영화의 파국 서사가 촛불혁명 이후 여유로운 ‘코믹 모드(comic mode)’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선 자본의 탐욕도 국가의 무능도 전경화되지 않는다. 다만 꿋꿋하게 각박한 삶을 헤쳐나가는 두 남녀 청년의 위기 돌파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2년이 지나 <엑시트>의 코믹 모드를 그대로 이어 받은 <싱크홀>에서 이와 비슷한 두 청년을 마주한다. 정규직 직원인 김대리(이광수)와 비정규직 인턴 은주(김혜준). 그들은 서울 입성과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박과장(김성균)의 집들이에 갔다가 빌라 한 동이 통째로 땅으로 꺼지는 싱크홀로 위기를 맞는다. ‘영끌’, ‘내 집 마련’, ‘빌라보단 아파트’, ‘몇억이 올랐다더라’, ‘촛불 정부’를 자처한 현 정부를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부동산 이슈들이 영화에 넌지시 스며든다. 물론 그건 영화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사회적 포즈일 뿐, 제대로 녹아들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엑시트>의 그 희망적인 청년들이 2년 만에 자포자기적 ‘소확행’에 자족하는 것이 마음 쓰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아등바등 살지 않기 로 했다고 하지 않는가? 싱크홀의 추락 이미지는 분명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의 반대말 일게다. 그러나 바닥을 친 후 비상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아니라 ‘나 그냥 포기하고 나 살고 싶은대로 살래’를 선언하는 청년들을 보는 것은 안쓰럽고 씁쓸하다. 그건 그들의 자유지만 강제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정영권 /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