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호 문화비평: 책의 운명] 책을 읽는다는 것

 십여년 전 일본에 가면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바로 지하철에서 너도 나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담한 문고본을 펼쳐 들고 주위를 아랑 곳하지 않고 책에 눈을 박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나만 그 장면들을 기억에 새겼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의 신문에 “책 읽지 않는 한국”을 개탄하는 칼럼이 실리면 으레 복잡한 지하철도 마다하지 않고 책을 읽는 일본의 독서 습관을 예로 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확실히 일본 하면 책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쿄의 헌책방이 몰려 있는 진보초에 가보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말 그대로 책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면서 그 주변에 생겨난 이 고서점들은 도 쿄에 가면 내가 꼭 들러서 절판된 서적들을 찾아 보곤 했던 곳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일본에서도 지하철에서 책 읽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간혹 가죽 커버를 입힌 문고본을 고이 읽고 있는 머리가 희끗한 승객들도 남아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독서현실을 개탄하는 기사들도 드물어졌고, 독서 모범국 일본을 거론하는 칼럼도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속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정보의 취득 수단으로서 독점적이었던 책의 기능은 쇠퇴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식의 체계화 기술로서 책이 사라졌다고 단언하는 것도 옳은 판단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식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은 책의 편제를 여전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다고 해도, 그 텍스트의 편집 은 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우리가 책을 펼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의 이미지로서 책은 지배적인 인식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와 책의 대중화

 일본은 여전히 세로 판형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읽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만, 중국이나 한국은 가로 판형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읽는 방식을 채택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세로 판형의 책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방식으로 책을 만들지 않는다. 이처럼 텍스트의 편집 방식은 지식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인쇄를 통제하는 일은 권력의 현안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정조의 문체반정은 가벼운 책을 누워서 보면 게을러지기에 얇은 책의 제작을 금지하는 칙령이기도 했다. 책을 지배하는 것이 권력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책의 판매 부수가 곧 권력이 되는 시대를 만들 어냈다. 무명의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투쟁』(1925)의 상업적 성공 덕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적하듯이, 근대의 도래는 책의 범람을 초래했다. 근대 이전에 장원 하나 값에 달했던 비싼 책들은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누구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흔한 물건이 되었다. 책이 넘쳐나서 이제 무엇을 읽어야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기에 울프 같은 작가는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독서 안내를 기고하기도 했을 것이다. 철도 여행 중에 읽을거리가 필요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가벼운 책을 처음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가 바로 펭귄 출판사의 창립자 앨런 레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책과 독서의 관념을 만들어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대중화를 가능하게 만든 물적 토대는 그 무엇도 아닌 신문과 잡지였다. 이 신문과 잡지는 길게 보면 임마누엘 칸트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글로벌 정보를 취득하던 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온 탐험가들을 만나는 한편으로 칸트가 당시의 신문을 읽 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알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른바 계몽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의 논리를 구성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늘 바뀐 독서 풍경은 지식 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은 내가 즐겨 읽은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헤밍웨이였는데, 전 세계를 주유하면서 글을 썼던 그의 삶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헤밍웨이 같은 작가가 가능했던 것은 전후 세계질서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헤밍웨이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의 뿌리는 내가 읽은 그 책들에서 시작되었다. 빅토리아시대의 영국 작가들이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작가들과 프랑스 지식인들이 글만 쓰는 전업작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신문과 잡지의 융성 덕분이었다. 헤밍웨이의 중편 『노인과 바다』(1952)는 당시 주 간지인 『라이프』에 게재되어 가판대에서 불티나게 팔렸고 작가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라이프』는 1936년 잡지왕 헨리 루스가 창간한 포토저널리즘을 기치로 내세운 시사잡지였고, 이런 유사한 잡지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작가들의 건재를 뒷받침했던 물적 토대였다.

전업 작가의 조건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을 먹여살린 것은 신문과 잡지였다. 비록 식민지 시기였지만, 1930년대에 문인논객의 원고료는 120원에서 350원에 달했다. 당시 신문기자 월급이 70원이었고 의사 월급이 100원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정말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되는 것이 의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었던 시대였다. 이런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작가의 신화도 가능했다. 카프카처럼 공무원으로 복무하면서 글을 쓰는 비전업작가도 있었지만, 결국 그를 발굴하고 평가해서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작가로 만들어준 것은 근대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그에서 파생한 출판시장 덕분이었다.
 작가들의 생계가 신문과 잡지 기고를 통해 보장되었기에 훌륭한 명작들이 책으로 만들어져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 오늘날 책의 황금기를 가져다 줬던 전후의 풍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억울하지만 냉정한 현실이다. 미디어의 중심이 신문과 잡지에서 인터넷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이제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여전히 글은 계속 살아 있고 누군가는 계속 쓰고 있다. 과거처럼 ‘문단’이라고 부를 집단이 있어서 이들만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신문과 잡지에 기고만 해서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이슬아 같이 본인 스스로가 매체가 되어서 생계를 해결하는 경우도 생겼다.
 한때 대학이 책의 온실 역할을 해줬지만, 오늘날 전일화한 시장논리는 대학마저 교육소비자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기업으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대학은 기업과 같은 경영방식을 도입해서 무늬는 기업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이윤과 무관한 모순적 기업으로 변화했다. 시장의 논리 대로 한다면, 대학이라는 기업이 이윤을 올리려면 더 많은 소비자들을 매혹시켜야 한다. 대학이 학생을 소비자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재난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고, 앞으로 닥쳐올 인구 절벽의 현실화는 이런 곤혹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질 높은 교육보다 학벌이 고등교육의 목표인 한국 교육 시장의 특성상 대학 교육은 점점 더 상업화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미래의 책

 출판시장의 판도도 글을 써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책을 쓰는 이유가 강연과 방송 출연이 되어 버린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원고료로 생계를 잇겠다는 전업작가는 무엇일까. 전업작가가 되기 어려운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취미생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터넷 시대는 굳이 돈 주고 살 필요 없는 텍스트들이 널리고 널려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책을 사보려고 한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이 지적인 호기심이야말로, 먼 곳을 여행한 탐험가를 집으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칸트의 미덕이기도 했 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그 순수한 호기심이 앞으로도 우리를 우리로서 존재하게 할 것이다. 이 호기심이 지속하는 한, 책은 그 형태를 달리할 뿐 계속 우리의 손길 닿는 곳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택광 /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